미국의 리틀보이 원폭 투하에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 제국
시민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마신 검은 비는 사실상 죽음의 비였음을 아무도 몰랐다.
아직도 박물관에 남아있는 검은 비의 흔적으로 이 방사능 비를 받아먹은 것이다.
방사능의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검은 비로 피폭자의 수도 함께 증가하여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피폭 이후 후유증으로 생긴 각종 암과 같은 병마와 싸우면서
핵폭탄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민들의 처참한 삶을 맞이한 후
그제야 일본 제국은 공식적으로 항복을 합니다.
히로히토 일왕 항복 방송은 "참지 못하는 일을 참고 견디지 못하는 일을 견디며 미래의 만세를 위해 평 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함께
일본 제국의 패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는다.
이러한 상황을 그 당시 미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리틀보이와 팻맨 - 두번의 핵폭탄 투하 후
단 몇 분 만에 전부를 잃어버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자들의 경험을 많이 듣게 되면서 윤리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헨리 L. 스팀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의 말에 따르면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다 "고 한다.
미국은 미리 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때부터 소련과 냉전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핵폭탄이 어떤 건지 알면서 투하해야만 하는 조종사의 입장도....
자신들도 모르는 상태로? 핵폭탄의 파괴력을 몰랐던 만큼 컸을 모두의 충격~~ 을 가히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한국의 피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핵은 일본 제국에 떨어진 것이지 한국과는 관계가 없는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1945년 당시 한국인 사망자는 약 4만여 명
약 7만명까지 달하는 피해자까지
히로시마가 산업도시인 만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여 조선의 많은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식민지란 이유로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처참함.
핵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조선 노동자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가 상상 이상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 더 많은 피해자가 나왔는데...
핵폭탄이 투하된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의 피폭자 수가 대거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정리나 재건을 위한 도시 복구에 노동력이 필요할 것으로 핵폭탄 이후 사후 처리를 조선인 노동자들이 방사능 처리에 한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사체 처리와 일본 피해자 구호에 보호 장비 없이 강제 노역과 도시 청소로 인한 피폭자 수 증가하였다.
조선인 피폭자대 사망자 비율은 57.1%로 일본 국민 33.7%보다 높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민교 교수가 실제로 강제동원 진상 규명위원회 활동을 할 때 40대 아들이 70대 아버지랑 30대 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온몸에 나타나 있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증상들
당대에 끝나는 게 아니고 현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가족에게 대물림되는 끝나지 않을 고통
존재해서도 사용해서도 안 되는 핵
다시는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구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조선인들의 고통이 있었고 여전히 고통받는 많은 피해자들이 있다.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이러한 길고 긴 식민지 생활을 끝내고 한국은 광복을 맞이한다.
끝나지 않은 우리 민족의 고통?
1943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이집트 카이로에서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중국, 미국, 영국 수장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연합국은 전쟁 이후의 처리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롤 해야 했고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 지역에 모였다.
영국, 미국, 소련의 수장은 얄타회담을 갖는데
소련을 끌어들이고 싶은 미국
독일이 항복한 날로부터 2~3개월 후에 대일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한 소련은
독일군과의 오랜 전쟁으로 이미 너무 지쳐버린 소련군
그러나 미국의 핵폭탄 투하 후 일본 제국의 패전이 확실시될 때쯤
다급히 참전을 결정한 스탈린
소련의 참전 전 일본 제국이 항복을 한다면?
얄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간 진행될 때 이탈리아가 항복한 이후
독일이 패전의 기미가 완연하자 연합국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고
이후의 점령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알타에서 회담을 가졌다(1945.02.04.~11.)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의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최고 인민위원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패전 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